
모든 생물은 진화의 과정을 거친다. 진화는 진보와는 다르다. 방향성이 없다. 즉, 그때그때의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형질이 살아남는다. “우월하다” 또는 “열등하다”의 관점이 아니라 그 시기의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가가 가장 큰 선택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생물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보인다. 인간에게 작용하는 진화의 압력은 자연환경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이 창조한 환경에 다시 영향을 받는다.
자연환경의 변화는 모든 생물에게 적응을 요하고 여기서 선택된 것들만 살아남아 왔다. 이것이 진화이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부터 인가 환경의 적응을 뛰어넘어 그들만의 세상을 자연 가운데 만들어 오기 시작했다. 정착생활을 넘어 문명이라는 사회시스템을 발전시켜 왔다. 이후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기계의 의존도가 높아지고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노력에 박차를 가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생활패턴이 바뀌고 필요한 영양소의 변화가 시작되어 왔다.
정리하면 인간은 본래 자연환경의 압력에 좌지우지되었던 시기를 거쳐 호모사피엔스 언제쯤부터 그들이 창조해낸 환경에 의해 인공적인 압력을 받아 가면서 여러 변화를 겪어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이 만든 기술이 오히려 질병을 유발한 대표적 사례가 바로 ‘각기병’이다.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에 도정 기술이 발달하게 된다. 쌀의 미강을 완전히 제거하여 온전한 백미로 전환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사회 전반에 각기병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왜 이런 현상이 유발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경험적으로 식단에 보리와 단백질을 추가하면 각기병이 감소한다는 사실은 확인되었으나, 당시에는 비타민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아 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1900년을 넘어 1920년대가 되면서 비타민에 대한 연구결과들이 속속 보고되었다. 크리스티안 에이크만에 의해 비타민 B1 (티아민, thiamine)의 존재가 밝혀지고 드디어 각기병이 바로 비타민 B1의 결핍으로 발병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각기병은 비타민 B1의 결핍으로 포도당의 에너지 전환에 문제가 생겨, 특히 에너지 소비가 큰 신경계와 심혈관계에 손상이 오는 질병이다. 탄수화물을 주식으로 하는 인구 집단에서는 주의해야 하는 질환이다. 도정기의 발달로 완전 백미 화가 가능해지면서 미강 (쌀겨)에 함유되어 있던 비타민 B1 결핍이 급격하게 유행하면서 일본 사회에 각기병이 대유행되게 되었다. 다만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극단적으로 벌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를 쌀을 소비하는 인구가 일본에 비해 크지 않았다는 점 또한 마늘을 충분하게 소비하는 식습관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마늘에는 주성분인 알리신 (allicin)과 비타민 B1이 함께 함유되어 있어 공기 중에서 마늘을 다지는 과정에서 알릴티아민 (allithiamine)으로 전환되어 비타민 B1 결핍을 막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동시대 통밀과 육류를 주식으로 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각기병의 위험이 적었다고 한다.
이후 일본에서는 비타민 B1에 대한 연구가 가속화되어 그 구조와 생리 활성을 규명하고 또한 생체이용률을 높이는 방법에 대해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였다. 비타민 B1인 티아민은 경구로 복용 시 소장에서 흡수되지만 수용성이 강한 성분으로 흡수율이 떨어지고 또한 체내 흡수 이후에도 비교적 빠르게 배설되는 특성을 보여, 전반적인 생체이용률이 제한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생체이용률을 높일 수 있는, 즉 흡수율을 높이고 배설률을 낮춰 생체 내에서 최대한 오래 머무리면서 비타민 B1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활성형” 형태 개발을 위한 요구가 커지게 되었다.

그림1. 알릴티아민의 합성 과정
1950년대 이미 일본에서는 연구의 성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하였던 한국인들이 각기병을 피해 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인 알릴티아민이 합성이 되었다. 알릴티아민은 일반 티아민에 비해 지속시간이 길고 따라서 비타민 B1의 결핍을 막는데 효과적이었다. 이 성분을 주 성분으로 하는 아로나민이 일본에서 출시되었고 이후 국내 제약사에서 이 제품을 유통하기 시작했고 피로회복, 신경 기능 개선, 각기병 예방 등이 적응증으로 성공적인 포지셔닝을 가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단점이 있었으니 복용 후 마늘 냄새가 올라오는 점이었다. 이 마늘 냄새는 양치로 해결되지 않고 호흡으로 땀으로 계속 배출되어 복용 순응도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림2. 푸르설티아민과 벤포티아민
이후 이러한 불편감을 해소하기 위해 또 다른 활성형 비타민 B1이 개발되었다. 바로 푸르설티아민 (Fursultiamine)과 벤포티아민 (Benfotiamine)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이들 또한 이미 다년간의 노하우를 쌓아왔던 일본에서 소개되었다는 점은 일본이 비타민 B1 연구에 진심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두 개의 성분은 현재 국내에서도 일반의약품 종합 비타민의 주인공으로 함유되어 있으며 한국인의 피로를 줄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필자는 포도당 대사에 관여하기 때문에 당뇨병 환자들이 필수적으로 복용해야 할 비타민으로 추천되고 있다. 특히 벤포티아민의 경우, 2020년에 발표된 연구에서 70대 경증인지장애 환자들이 하루 600mg (300mg씩 2회)을 12개월간 복용한 결과, 설문 기반 인지기능 평가에서 유의미한 개선이 관찰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림2. 벤포티아민의 경도인지장애 개선 논문. 경도인지장애를 겪는 70대를 대상으로 1일 300mg씩 2회 1년 복용 결과, 설문조사를 통해 인지능 개선 결과가 보고됨.
결국 일본의 도정 기술 발전에서 비롯된 각기병의 대유행은 일본을 활성형 비타민 B1 연구의 선도국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한 단계 확장해 보면,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기술 환경에 다시 영향을 받으며 일종의 “인공진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자연 진화가 방향성 없이 축적되는 적응의 결과라면, 인공진화는 특히 영양학적 변화에 기반하여 과학적 근거로 신체 변화를 인지하고, 이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기술 발전이 촉발한 영양소 공급의 변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필수 영양소의 실체를 규명하게 했고, 더 나아가 생체이용률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발전을 이끌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자연 진화와 인공진화의 경계에서 영양학적 의미를 해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스스로를 재설계해 나가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자연의 시간 속에서 탄생한 인간은 이제 자신이 구축한 환경 속에서 또 다른 형태의 진화를 이어가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앞으로의 인류 건강과 의학의 방향성을 규정하는 핵심 축이 될 것이다.
진화에 답이 있다.